이명선 시집 / 다 끝난 것처럼 말하는 버릇

진유고 2024. 12. 4. 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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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끝난 것처럼 말하는 버릇
걷는사람 시인선 63번째 작품으로 이명선 시인의 『다 끝난 것처럼 말하는 버릇』이 출간되었다. 이명선은 2017년 《시현실》, 2018년 《경인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인은 2018년 《경인일보》 신춘문예에서 2015년 9월 시리아 난민 아이의 죽음을 소재로 한 「한순간 해변」이라는 작품으로 “인류가 저지르고 있는 비극을 그리면서도 인내와 절제가 미덕인 시세계를 펼쳤다”는 평을 받으면서 그만의 독특한 시세계를 처음 선보였다
저자
이명선
출판
걷는사람
출판일
2022.06.03
가족력은 불치가 아니고 완치가 어려운 난치였지만 형의 파리지옥처럼 끈끈해 병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구태의연하게 늘 도망치는 꿈을 꾸었다 같은 밑바닥을 가지고 있는 우리의 삶에 빛을 들이듯 서로의 어린 체온 속을 파고들다 잠이 들곤 했다

p.11








걸었다


전시된 사진을 보며 사진전의 제목을 생각하다
내가 늘 문제라서 나답지 않기로 하였다


뭉친 근육을 풀다 보면 집보다 밖에서 아침을
기다리게 되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뭉개짐에
대해 귀뜀해 주고 싶었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니라면서 자꾸 고장
나서 사람에게로 되돌아가지 못할 계절이 돌아오고 있다


사람을 지나다 보면 남 일 같지 않아 처음 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한다


p.32~33








우리는 한 가족처럼 토끼 가죽을 쓰고 토끼굴을 찾으러 갔다 얼음 구덩이에 빈손을 넣어 보는
일이 잦았다
매사는 묶이고 손톱은 자주 닳아 정색을 하거나 생색을 내다가도


흔한 것이 천한 게 아니라 말했지만 한 개의
굴만 파는 너의 바람도 평범해 보이진 않았다


서로에게 연민을 건네면서 필사적으로 사투를
벌이는 일이라 나는 겨울을 물리적 고립이라
했고 너는 겨울을 절대적 낙원이라 했다


p.86~87










아스파라거스를 굽는 저녁


양초를 켜면 너는 행복에 가까워진 느낌이
든다고 했어


식탁 한쪽에 놓인 작은 어항은 어디서나 눈
맞추기 좋은 자리에 있고


누군가의 흔적을 지우듯 어항 위로 물고기가
떠오를 때마다 신들의 이름도 같이 지워졌지


균열을 맞추려는 것처럼 한 세계가 한 세계의
멸망을 기록하며 지켜보려는 것처럼 이제 막
둥글어질 세상처럼


어항은 공실이 되어 갔어


너는 물고기의 생김새에 따라 신들의 이름을
마구 갖다 붙였지


늘 터져 보고 나서야 아픈 말도 수용할 줄 알게
되는데 우리는 각자의 바다를 묻고 돌아와서는
살펴보지 않았어


극복은 극기나 선의가 아닌데


아스파라거스를 굽는 식탁 위로 한 세계가 쿵
하고 떨어지고


이제는 양초를 켜지 않아도 한때 우리 곁에
신들이 살았었다고 말하면


믿어 줄래


p.118~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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