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라 시집 / 훗날 훗사람

진유고 2024. 11. 21.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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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훗사람(문학동네시인선 39)
한국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문학동네시인선」 제39권 『훗날 훗사람』. 1981년 《문학사상》에 ‘히브리인의 마을 앞에서’외 6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한 이후 대한민국 문학상을 수상하며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펼쳐온 이사라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이다. 낡고 느린 것들에 대한 끝없는 애착과 관심, 삶의 유적들을 따라 존재론적 근원에 이르고자 하는 저자의 형이상학적 열망이 담긴 시편들을 만나볼 수 있다. 더욱 깊어진 시선으로 옹색한 현실을 자유롭게 떠났다가 오랜 시간을 통과한 후 다시 자신으로 귀환하는 선순환 형식의 시편들을 통해 느릿하게 낡아가는 시선들을 들여다본다. 부재의 흔적, 시간의 흔적으로서 얼룩을 이야기하는 ‘분홍 모자’, ‘유적지 돌바닥을 걷다’, ‘느린 이별’, ‘산에서는 뿌리내리는 것들도 산다’, ‘둥근 반지 속으로’, ‘낯선, 오래된 카페’, ‘길 위의 길’, ‘빈틈’ 등 67편의 시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저자
이사라
출판
문학동네
출판일
2013.04.17
검버섯 피부의 시간이 당신을 지나간다


시간을 다 보낸 얼룩이 지나간다


날이 저물고 아픈 별들이 뜨고
내가 울면
세상에 한 방울 얼룩이 지겠지


우리가 울다 지치면
한 문명도 얼룩이 되고


갓 피어나는 꽃들도 얼룩이 되지


지금 나는
당신의 얼룩진 날들이 나에게 무늬를 입히고
달아나는 걸 본다
모든 것을 사랑하였어도
밤을 떠나는 별처럼 당신이 나를 지나간다


p.12







가슴 위로
이맘때쯤 배 한 척 지나가는 일은
숨겨두었던
푸른 눈물에 상처를 내는 일이다


거품처럼 요란한 그 길에서
기억은 포말처럼 날뛰고 뒤집어지는데,
그 위를
물그림자가 가고 있다


눈물 속에서 뿜는 용암 덩어리가 스러지면


모든 길은 떠나거나 흐르거나
칼날 지나간 자국마다
그것을 견딘 힘을 본다


어느새 지워지는 흉터의 길들처럼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그 길의
한순간이 잘 아물어 있다


낯선 세계에 잠시 다녀온 듯
낮잠에서 깨어난 듯


p.21









잠시 바꿔 낄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는데
하루살이들이 전구 속에 죽어 있어
다시 생각을 고쳐본다
우리도 하루살이들
곧 이렇게 되는데
그런데 정말 밝을수록 더 좋은 걸까
나는 더 빨리 빨려들 텐데


p.38










이렇게 힘없이 누워
그때를 떠올리면 모두가 기억인,
뒤꿈치 단단해지고 갈라지고 피 터지던
시간들

(...)

요람 속 흔들의자의 리듬들
이곳에 그저 두고
갈 사람은 가고
세 아이들 다시 태어나는 길 끝에서


나는 다만 귀 씻고 사뿐히 벗어날 뿐


저 탈신의 현장
그곳 그림자 나라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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