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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부러지더라도 희미해지지 말자는 약속을 해요”
슬픔의 한가운데로 가라앉는 이들에게 건네는 끈질기고 다정한 안부,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 저자
- 서윤후
- 출판
- 문학동네
- 출판일
- 2021.05.21
싸움이 끝난 뒤 깨진 화병은 누가 치우나
남겨진 사람은 조심성 없이 쓸어 담고
집 잃은 새를 보듬듯 꽃을 주워다
종량제 봉투 앞에 서게 될 때
그렇게 향기가 스민 어둠은 밤새 사라지지 않고
기나긴 복도를 생각하면
열려 있던 문들이 하나둘 닫히기 시작한다
잠들기 위해 눈감으면 비로소 눈뜨는
화병에 베인 손날의 붉은 눈
p.20
당신은 여름의 한복판에 서서 점점 야위어간다
푸른 가로수 그림자와 구분되지 않아 난처한
풍경이었지
녹다 만 채로 다시 얼어붙지 않기 위해 자신을
계속 흔들어보는
그런 채집 생활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파묻었던 마음이 밀려들지 않도록 하염없이
방파제를 걷고 또 걷는
p.31
아파야만 아픔이 풀릴 수 있대요
뭉친 근육과 자신도 모르게 한 결심이
하나의 심박동을 나눠 쓰며 싸우는 것을 이젠
허락했어요
어깨가 먼저 죽어가고 기후에 어두워져요
매일 서늘하기도, 종종 젖기도 하는
나무를 흔들어야만 어제 날씨를 알 수 있는
사람이 돼요
마르지 않고 살아 있어서 종종
발을 주무르며 걸어온 나날을 복원합니다
p.56
요즘도 너는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니
창문을 열지 않고도
들이마실 어둠이 아직 많다는 것을 아는
구겨진 표정을 꺼내놓았니
(...)
고리도 손잡이도 달린 게 없는 혼자가
끝끝내 어디엔가 매달려 있다는 기분조차
스스로 끝낼 수 없다는 게 가끔 아찔하지 않니
키 크는 꿈처럼
첫 시집을 끝으로 서재에서 영영 사라진
젊은 시인의 초상화를 본 적 있니
눈에서 계속 흐르는 것을
어떻게 주워 담으며 살고 있을지
p.58~59
집에 있어도 집에 가고 싶다고 말하는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고 말하는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는......
엉겁결에 우리는 세상에서 서로의 약점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된다
피도 눈물도 모르게
집 앞 버려진 신문들은 모두 평일의
소식들뿐이었다
당신은 계속 자고 싶어한다
조금 쉬면 괜찮다고 말하지만
심장에는 피가 멎지 않는다
비행기가 저녁과 밤 사이를 가로지르며
날아간다
벌어져 있는 시간을 어쩔 줄 몰라 하며
떠 있다
P.8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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