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순 시집 / 한 잔의 붉은 거울

진유고 2024. 11. 19.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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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잔의 붉은 거울
1979년 계간 <문학과지성>을 통해 문단에 등단한 김혜순 시인의 여덟번째 시집, 『한 잔의 붉은 거울』. 57편의 시는 '붉은색'을 시적 상상력에 대입시킨다. 특유의 감각적 언어와 시적 상상력으로 우리 시대 대표적인 여성 시인인 저자는 이번 시집에서도 변함 없이 '끔찍하고 적나라하고 아름다운' 시적 세계를 창조하는 탁월한 감성을 빛내고 있다.
저자
김혜순
출판
문학과지성사
출판일
2004.05.07
얼음을 담요에 싸안고
폭염의 거리를 걷는 것처럼
그렇게 이 시간들을 떨었다.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한 줄기 차디찬 핏물이
신발을 적실 것처럼.

2004년 5월 김혜순







너도 참, 이마에 이슬이 맺혔구나
나는 너의 날이 선 이마를 손끝으로 스윽
밀어본다
네 몸은 내가 맞대고 누울 상처 하나 없이
날카롭구나
한 줄 번개처럼 지나가는 시린 너의 몸

p.22








바다는 지쳤어요
파도치기 지쳤어요
왔다가 갔다가 그러는 거 이제 그만 하고
싶었어요
축축한 바람이 온몸을 둘러싸고 놓아주지 않는 거
지구는 둥글어서 내 품도 둥글어서
내일인지 어제인지
똑같은 세월이 왔다 갔다 하는 거
똑같은 등대가 쉴 새 없는 밤낮처럼 켜졌다
꺼졌다 하는 거
저 머리숱 적은 섬의 발뒤꿈치 그 짜디짠
소금 맛을
혓바닥 속속들이 모두 모두 기억하는 거
이제 그만 지쳐버렸어요
너를 멀리 데려가줄게 속삭여놓고는
언제나 사랑만 하고 돌아가는
저 태양이 밤마다 몸속으로 기우는 거
모두 모두 지쳤어요

p.35








우리의 침대는 서로 다른 대륙에 놓여 있어서
내가 잠들 때 너는 일어나고
내가 일어날 때 너는 잠들지

p.37








네 생각만 하다가 내릴 곳을 놓쳤다
세워주세요 벨을 누르자 비가 쏟아졌다
길거리 사람들의 몸이 사선으로 기울었다
내가 빗속으로 뛰어들자 그들의 비명 소리
뛰어가는 사람들의 목구멍 속에서 말하는 새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남의 몸에 살긴 싫어 그 새들이 소리쳤다
남자는 여자를 따라가고 여자는 여자를 따라가고
여자는 아까 그 남자를 따라 달려갔다

(...)

면역 시스템이 망가진 하늘이 기침을 해댔다
허벅지 밑에선 이미 검은 반점들이 전신으로
번지고 있었다
빌딩 꼭대기에 붙은 시곗바늘들이 일제히
오른쪽으로 기울고
얼어붙었다가 지금 막 녹고 있는 진흙 덩어리
못난 얼굴들이 땅바닥에 척척 떨어져 뒹굴었다
남의 몸에서 살던 새들이 일제히 날아오르며
침을 갈기며 마구 마구 소리를 질렀다
네 생각만 하던 내 머리통이 거리 전체로 번졌다

p.39~40








꿈속에서 울어본 적 있나요
너무 울어서 잠에서 깨어났는데도
저 바다 밑 깊은 곳에서
윙윙 목소리가 올라오는 것처럼
아무도 내가 부르는 소리
못 알아듣던, 그런 적 있었나요


꿈속에서 도망친 적 있나요
올라가도 올라가도 어딘가
도착하지는 않은 적 있었나요
꿈속에선 늘 갔던 곳인데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것처럼 그렇게
힘든 적 있었나요 그런 적 있었나요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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