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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높은 나의 이마
2012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으로 등단한 김영미의 시집 『맑고 높은 나의 이마』가 아침달에서 출간됐다. 등단 8년 만에 펴내는 첫 시집이다. “지나치려는 순간 다시 붙잡는 힘”(김행숙 시인)이 있다는 평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김영미는 이번 시집에서 총 45편의 시에 특유의 맑고도 서늘한 서정을 벼려놓는다. 그의 시가 빛나는 한편 서느런 기운을 품고 있는 까닭은 “있다가 없어지는 것들에 더 오래 주목”한다는 그의 시선에 있다. 추천사를 쓴 김언희 시인은 김영미 시집의 이러한 특징을 가리켜 “빛이 빠져나가는 한순간과 그 순간이 다른 빛으로 채워지는 기적 같은 찰나, 그 자체”라고 말하며 “빛을 삼키는 빛의 시집”이라 평한다.
- 저자
- 김영미
- 출판
- 아침달
- 출판일
- 2019.06.20
나는 누구의 빛도 되고 싶지 않았다
p.15
운동화를 적시며 여름이 오고 있었다
우리들의 여름은 지킬 게 많았다
지킬 게 많다는 건 어길 게 많다는 것
계절은 지겹도록 오래될 텐데
우리들의 여름은 처음처럼 위험했다
p.20
우리는 얼음 배 위에 서 있었다
언 강은 아침부터 캄캄한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그 한 조각 위에서 우리는
손을 잡고 떠내려가고 있었다
당신에겐 나의 집이 없고
나에게는 당신의 집이 없고
p.26
버스는 국도를 이어 나갔다 미끄러운 밤이었다
갇힌 물을 향해 달려가는 오늘 밤은 모두
어디서든 왔다
댐에 가까워질수록 버스가 흔들렸다
흔들릴수록 나는 잠이 쏟아졌다
물이 쌓이는 소리를 들은 적 있다 문을 둘러싼
아주 체계적인 소리
와이퍼가 물을 밀어내고 있었다 나는 눈을 뜨려 애썼다
버스가 기우는 중이었다
묶였던 머리가 풀리고
오늘 밤은 모두 어디로든 갈 것이었다
p.35
플라스틱 와인 잔을 들며 너는 붉어졌다
드디어 여름이 가고 있어
가로로
혹은
세로로
층층이 그어놓은 칼자국, 여름은 또 오겠지
p.36
깨진 컵에 물을 따르기로 한다
차가운 측면에 혀를 대기로 한다
주방에선 반드시 실내화를 신기로 한다
우리의 발등을 찍는 것들로부터 최대한
멀어지기로 한다
그날의 나이프에 대해선 침묵하기로 한다
허공은 새도 가르고 나비도 가른다
반짝이는 날렵한 아름다운 깃털이었다
식탁의 기울기를 맞추는 네 어깨의 단면
저울처럼 오르고 내리는 숨소리에 안심하기로
한다
양면으로 채워지는 유리의 수고를 기억하기로
한다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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