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SMALL
당근밭 걷기
생의 감각을 일깨우고자 하는 염원을 담아 슬픔도 결핍도 정면으로 마주하며 섬세하고 정확한 문장으로 담아내는 안희연 시인, 그의 네번째 시집 『당근밭 걷기』가 문학동네시인선 214번으로 출간되었다.
이번 시집은 ‘여름 언덕’에서 내려와 ‘당근밭’을 걸으며 보다 겸허한 마음으로 삶의 신비와 여분의 희망을 건져올리려 애쓴 시인의 지난 4년을 담고 있다.
- 저자
- 안희연
- 출판
- 문학동네
- 출판일
- 2024.06.15
발밑으로 돌이 굴러온다. 어디서 굴러온 돌일까. 쥐어보니 온기가 남아 있다.
가엾은 돌이라고 생각하며
걷다보니 또 돌이 굴러온다. 하나가 아니라면.
거듭해서 말해져야 하는 이야기가 있다면.
나는 간곡한 돌을 쥐고 있다. 바닥을 살피며
걷는 버릇이 생겼다.
돌이 온다 또 돌이 온다. 주머니는 금세 불룩해진다. 더는 주워 담을 수 없는데 계속해서 굴러오는 돌이 있어서. 나는 돌의 배후를 생각하기 시작한다. 무거운 돌은 무서운 돌이 된다.
사방에서 돌들이 굴러온다. 굉음을 내며 무너져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모르는 돌은 무한한 돌.
틀림없이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돌의 의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p.15
일제히 던진다. 야구공, 돌, 신발, 못......
온갖 것들이 사방에서 날아든다.
오직 던질 것.
그것이 이곳의 룰.
시작되었으므로 질문은 허락되지 않는다.
유리병, 화분, 흰 벽을 쓰다듬던 장갑에서부터
먹다 만 사과에 이르기까지.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그들은 던진다. 지치지
않고 던진다.
우리는 파괴를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에요.
가혹하다고 생각할수록 영혼만 병들 뿐이죠.
하나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우리가 하는 일들.
수십 명으로 쪼개진 내가 한바탕 난장을 벌이고 있다.
(...)
오직 견딜 것.
그것이 이곳의 룰.
p.26~27
하지만 너무 오래 물속이 있는 건 좋지 않아요
이제 그만 나와 함께 뭍으로 가요 혼자 있고 싶은 거라면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오두막을 지어줄게요
뭍에도 아름다운 것들이 많이 있어요 곧 가로등에 불이 켜질 시간이에요
그만 깨어나주세요
자꾸 그렇게 자신을 잊으려 하지 말아요
p.85
어떻게 살 거냐고 묻지 마세요
어떻게 살아 있을 거냐고 물으세요
오늘도 무사히 하루의 끝으로 왔다
나의 범람,
나의 복잡함을 끌어안고서
p.121
반응형
LIST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용미 시집 / 초록의 어두운 부분 (0) | 2024.11.15 |
---|---|
김사이 시집 / 반성하다 그만둔 날 (2) | 2024.11.15 |
김영미 시집 / 맑고 높은 나의 이마 (1) | 2024.11.14 |
신수형 시집 / 무빙워크 (2) | 2024.11.14 |
조용미 시집 / 나의 다른 이름들 (3) | 2024.1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