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이 시집 / 반성하다 그만둔 날

진유고 2024. 11. 15.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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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하다 그만둔 날
오래전 절판되어 더는 서점에서 찾을 수 없었던 우리 시대 대표 시집을 선보이는 걷는사람 ‘다시’ 열한 번째 시리즈로 김사이 시인의 첫 시집 『반성하다 그만둔 날』이 출간되었다. 시인 김사이는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구로노동자문학회’에서 시를 공부하며 2002년 《시평》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여성이자 노동자로 살아가는 일에 꾸준히 골몰해 온 김사이는 “가리봉의 시인”(해설, 방민호)이라는 명명처럼 가리봉의 주변부와 그 삶을 핍진하게 그려낸다. 시인의 화자들은 가리봉이라는 공간에 산재한 채로 존재하며, 서울이라는 환상의 이면을 살아내는 일인칭 인간으로 상징된다. 김사이의 시 세계를 따라가다 보면, 생이라는 유한함 속에서 꿈틀거리며 절절히 살아 숨 쉬는 이들을 응시하게 된다. “어느 곳에도 온전하게 속하지 못하”는 존재들은 “살아 있는 동안 끊임없이 이력서를”(「이력서를 쓰다」) 쓰는 행위를 반복하며 저마다의 생을 유지하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사회는 “이제 한 명 죽는 건 뉴스거리도 되지 않”(「목숨값은 얼마일까」)으며, 이웃 공동체는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구도 무심한”(「숨어 있기 좋은 방」) 상태가 되어 버렸다. 차츰 나빠지기만 하는 것 같은 세계에서 “인간에 대한 두려움이 혹처럼”(「카타콤베」) 자라나는 것은 우리가 마주할 수밖에 없는 자연스러운 비극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노동에 대해 사유하는 김사이의 화자들은 보란 듯이 끈덕지게 살아내고야 만다. 시인은 “노동하는 육체”를 통해 몸소 체화한 언어를 담대한 목소리로 끄집어낸다. 여성 노동자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폭력을 체감한 일인칭 화자의 발화는 자본의 구원이 “개인의 욕망과 능력”(해설, 장은영)에 달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지하기에 일종의 선언처럼 느껴진다. “그저 그러려니 사는 게 그러려니 하면서” 체념하기에 그치지 않는 인물들의 태도는 “한낮에도 깜깜한, 틈을 비집고 들어온 가느다란 빛”(「머물기 위해 떠나다」)이 우리 곁에 늘 머무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벌레 같은 것들이” 자신의 ‘살아 있음’을 증명하듯 “계속 톡톡 튀어 오르는” 것처럼, 우리도 결국은 살아남아 “생의 반란은 이렇게 찾아”(「초록눈」)온다는 가능성을 보여 주고 마리라는 것을, 시인은 이미 알고 있다. 그러니 여성 노동자의 삶으로부터 시작된 시들이 모여 하나의 세계가 되고, ‘인간다움’에 대한 논의의 확장이 가능해진다. 방민호 문학평론가는 김사이의 시 세계에서 주요한 의미를 함축하는 가리봉이 “삶이라는 것의 물질성이나 육체성 같은 것이 헐벗은 채로 드러나는 곳”이자 “인간은 벗은 채 와서 벗은 채 돌아가는 존재임을 깨닫게” 만드는 계기로 작용한다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또한 시집 전반에 산포된 “서울이라는 찬란한 이름의 배수구가 보여 주는 기이한 삶의 국면을 가능한 한 폭넓게 포착하려는 의도”를 예리하게 짚어내는 동시에 “가리봉 연가가 아니라 존재의 불안정성을 딛고 새로운 자기를 만들어 나가려는 여성 화자의 자기 응시를 담은 시집으로서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을 조명하며 시집의 길잡이가 되어 준다. 십오 년 만에 복간된 시집을 기념해 오늘날의 시선을 더한 장은영 문학평론가는 이 시대의 노동이 여전히 “공론장에서 밀려나 개인의 선택과 책임의 문제로 떠넘겨”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럼에도 김사이 시인이 가진 “죽은 노동을 거부하는 언어”가 “자본이 몰수하는 인간성을 되찾고 절망의 감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충동을 드러내기 때문”에 “절망의 기록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포착하며 또 하나의 희망을 본다. 이 시인은 언제까지나 가장 인간다운 빛을 향해 용감히 나아갈 것만 같다.
저자
김사이
출판
걷는사람
출판일
2023.10.30
가리봉오거리 가는 공장들 담 아랜
우울한 가슴들이 다 모였다
담벼락에 달라붙어 눌은 먼지들 빈 담뱃값
썩은 나뭇잎 비닐봉지 팔다리는 물론
머리 없는 나무들
한겨울 매일같이 옷깃 세우고 지나다닌 길
아무것도 보지 않고
그저 그러려니 사는 게 그러려니 하면서
저만치 앞에서 자꾸 눈앞을 아른거리는 무엇에
꽃가루 날리는구나 눈 조심해야지 생각만 하며
그러나 다가갈수록 작은 벌레 같은 것들이
왔다 갔다 길을 어지럽게 했다
가까이 가면 아무것도 없는
없지만 눈에는 계속 톡톡 튀어 오르는
생의 반란은 이렇게 찾아올까
썩은 썩어 버린 듯 내던져진 작은 나무들에
아주 작은 초록눈들
삐죽이 솟아나 있었다 쌀알만 한 눈들이
나무 가지가지마다 하늘을 우러러 다시,
자꾸 내 발길을 붙잡고 눈을 낮추도록 하고
쉼 없이 돌아가는 공장 기계 소리 귀 기울이게
하고
제 모양도 갖추지 않은 제 색깔도 못 낸
삶의 늪 구덩이 속에서 나를 향해 가슴을 여는
그것들
보고 있노라니 주위가 초록 물들어 간다

p.11~12










내 시가 시작된 곳
젊음의 덫이기도 했던
이 거리 구석구석 몸에 새겨졌다


떠나야겠다
시가 너무 오래 머물러 있었다


p.35








전동차 뜨거운 소음이 멈추고
구겨진 플라스틱병 우그르르 퍼지듯
밀려나오는 사람들
다다닥 헉헉 툭툭 휘익


매일 아침 수많은 발길이 가로지르는 이곳
같거나 혹은 다른 모습으로
억겁의 인연이었을지도 모른다
낯설게 통과하는
익명의 환승로


햇살에 눈떠 숨을 쉬며 시작되는 일상
나서면 땅속 깊게 뻗어 있는 에스컬레이터
가만히 줄 서 있다 발을 내디디면
질서정연한 낯선 등이 보이고
질서에 순화된 말 없는 저 등
올라가고 내려오는 동안에 이탈할 수 없어
무한한 아침 소란 속에서도
앞 등만 보이는 행렬은 더욱 침묵이다


뒤이은 행렬에 내 등을 내주며
좀비처럼 오르는 고행의 행렬
돈 벌러 가는 출근길
그래야 산다


p.67~68









서른이 넘어서야
떠나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다
홀로 떠나는 법을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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