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미 시집 /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진유고 2024. 11. 12. 09:18
반응형
SMALL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그리운 마음일 때 ‘I Miss You’라고 하는 것은 ‘내게서 당신이 빠져 있기(miss) 때문에 나는 충분한 존재가 될 수 없다’는 뜻이라는 게 소설가 쓰시마 유코의 아름다운 해석이다. 현재의 세계에는 틀림없이 결여가 있어서 우리는 언제나 무언가를 그리워한다. 한때 우리를 벅차게 했으나 이제는 읽을 수 없게 된 옛날의 시집을 되살리는 작업 또한 그 그리움의 일이다. 어떤 시집이 빠져 있는 한, 우리의 시는 충분해질 수 없다. 더 나아가 옛 시집을 복간하는 일은 한국 시문학사의 역동성이 드러나는 장을 여는 일이 될 수도 있다. 하나의 새로운 예술작품이 창조될 때 일어나는 일은 과거에 있었던 모든 예술작품에도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이 시인 엘리엇의 오래된 말이다. 과거가 이룩해놓은 질서는 현재의 성취에 영향받아 다시 배치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현재의 빛에 의지해 어떤 과거를 선택할 것인가. 그렇게 시사(詩史)는 되돌아보며 전진한다. 이 일들을 문학동네는 이미 한 적이 있다. 1996년 11월 황동규, 마종기, 강은교의 청년기 시집들을 복간하며 ‘포에지 2000’ 시리즈가 시작됐다. “생이 덧없고 힘겨울 때 이따금 가슴으로 암송했던 시들, 이미 절판되어 오래된 명성으로만 만날 수 있었던 시들, 동시대를 대표하는 시인들의 젊은 날의 아름다운 연가(戀歌)가 여기 되살아납니다.” 당시로서는 드물고 귀했던 그 일을 우리는 이제 다시 시작해보려 한다.
저자
조용미
출판
문학동네
출판일
2021.12.15
상처나 흉터는 우리가 그것을 다시
들여다볼 때
훨씬 더 고통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아야만 치유되는
아픔이나
상처,
나는 눈을 돌리지 않고
오래오래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지난가을, 떨켜에서 뚝 뚝
자유롭게 떨어져내리던 나뭇잎들을
기억한다.
이제 나도 그렇게 묵은 것들을
털어내려 한다.


1996년 4월. 조용미







내가 라일락, 하고 부르면
말은 벌써 나무가 되어
그 자리에서 향내를 낸다

p.15









문득, 눈을 떴다
몸의 어딘가에 통증이
통증이, 눈앞의 펼쳐진 책을
고통스럽게 마주했던 순간밖에


믿을 수 없는 사실이다 허리에
누런 고름을 속옷에 찍어놓으며
짙은 분홍으로 솟아 있는 이것은
무엇인가 나도 모르게 돋아난
이것은 상처인가
나는 총에 맞은 짐승처럼
고개를 숙여 그곳을 들여다본다


그토록 짧아서 평화로울 수조차 없었던
이 한여름의 낮잠이
나에게 흉기를 휘둘러댄 것이다
그동안 잠속에 빠져 나는
어디를 다녀왔는가


p.22








늦가을 오후
잔디 넓은 곳에 앉아
햇볕을 쪼인다
머리카락은 따스해지고
햇살 끝에 묻어나는 하얀 먼지들

p.58









마음이 지쳐 있는데
몸을 누인다
힘없이 누워 있는 마음을 위로하느라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몸
두 무릎이 통증이 심한 가슴 가까이
올라와 있다


무릎과 가슴 사이의 빈 공간에서
쉬는 숨


속눈썹 안의, 제 아픔에 겨워 한없이
투명해진 눈
적막에 고인,
감겨지지 않는
길게 뜬 두 눈


탁자 위 유리 꽃병에 발을 담근
프리지어가
바삭,
마른 소리를 내며 한켠으로 기울어지는
전화벨이 길게 울리는
적막한 방


p.82





반응형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