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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것과 없는 것
김이듬의 여덟번째 시집 『투명한 것과 없는 것』을 문학동네시인선 204번으로 출간한다. 2001년 데뷔 이후 에로티시즘이 돋보이는 도발적인 시편들로 주목받기 시작한 시인은 기성의 부조리에 일침을 가하는 날카롭고도 명랑한 활기와 변방으로 떠밀려온 존재들을 감싸는 지극한 사랑으로 독창적인 시세계를 구축해왔다. 김이듬은 김춘수시문학상을 비롯 다수의 국내 문학상을 수상했고, 2020년 『히스테리아』의 영미 번역본이 전미번역상과 루시엔스트릭번역상을 동시 수상하며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불합리한 세상을 시로써 자꾸만 들여다본다. 이 도시를 사랑할 수 없다는 체념의 감정이, 이곳에서는 나의 실존을 확인할 수 없다는 미지의 두려움이 화자를 압도해온다. 그러나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도, 화자는 기존의 이해에 안주하지 않고 세계를 다면적으로 들여다보려 한다. 보이지 않는다 해서 없는 것은 아닐 터, 그 차이를 알아채기 힘들더라도 ‘투명한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며 세계와 존재의 본질을 찾고자 한다. 이 끈질긴 재탐구는 비록 모순된 세상일지라도 사랑하려는 마음과, 상처 입은 존재들을 끝끝내 살아가게 하려는 의지에서 비롯된다.
- 저자
- 김이듬
- 출판
- 문학동네
- 출판일
- 2023.11.14
가진 게 없지만
시와 함께라서
제 삶은 충만하고 행복했습니다
어제 시골의 한 회관에서
이십대 신인의 수상 소감을 들었다
눈물이 났다
나만 이상하게 살아가는 건 아니다
2023년 11월 담양 글을 낳는 집에서.
김이듬. p.5
유리창을 닦는다
안에서 닦고 밖으로 나가서도 닦는다
유리창을 유리창이 없는 것처럼 닦아놓으면
새가 부딪혀 죽는다
사람의 얼굴이 깨지기도 한다
(...)
커다란 창이 있는 호텔 라운지형 카페에서
나는 주말에만 아르바이트한다
바깥 사람들은 상스럽게 부채질하며 말다툼하고
안은 쾌적하지만 약간 춥다며 붙어앉는 이들도
있다
내부 적정 온도에 어울리는 이들이 주요
고객이다
조금 싼 데가 생기면 옮길 거면서
오늘은 아는 사람과 마주치지 않기를
모든 사물과 사람들이 가진 양면성에 관해
생각한다
투명한 것과 없는 것을 혼동하지 않을 때까지
p.20
매 순간 흘려보내지 않으면 역류하는 마음
기억은 전기장판처럼 끈적거린다 침묵 중에
소리가 크게 들린다
p.83
완벽한 슬픔은 여기 없다
그걸 겪은 사람은 모두 죽었으니까
비가 오래 왔다
비라고 그러고 싶진 않았겠지
새들이 죽어가는 나무에게 노래 들려주러 왔다
어차피 우리는 오해하는 족속
내 방은 습하고 어두운 빛으로 가득했다
대개는 한 달도 못 살고 떠났지만
p.149
공부 열심히 해.
내가 누구 때문에 사는지 알지?
한 여인이 전철 안에서 통화한다
아마도 전화기 너머 자기 자식에게 묻는 것 같다
자식이 받을 부담감이 통째로 내게 건너온다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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