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이 시집 /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고 한다

진유고 2024. 12. 8. 21:49
반응형
SMALL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고 한다
2002년 계간 『시평』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한 뒤 노동 현장과 소외된 삶의 풍경을 그려온 김사이 시인의 두번째 시집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고 한다』. 《너의 오랜 습관인 나》, 《나는 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가끔은 기쁨》, 《너에게로 가다》, 《다시 반성을 하며》등 다양한 작품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저자
김사이
출판
창비
출판일
2018.12.07
문을 열고 나가니
안이다
그 문을 열고 나가니
다시 안이다
끊임없이 문을 열었으나
언제나 안이다
언제나 내게로 되돌아온다
문을 열고 나가니
내가 있다
내게서 나누어지는 물음들
나는 문이다
나를 열고 나가니
낭떠러지다
닿을 듯 말 듯 한 낭떠러지들
넋 나간 슬픔처럼 떠다닌다
나는 나를 잠그고
내가 싼 물음들을 주워 먹는다


p.10









밥을 하고 청소를 하고
아이를 낳고 젖을 주고 흙을 다지는데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


따닥따닥 붙은 콜센터에서 상냥하게 친절하게
보이지 않아도 웃고 보이지 않아도 참아서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


직업소개소를 찾으니
학력 미달 경력 없고 나이 많고 애도 있어
손가락 하나로 끌려나왔다 끌려나가도 그 자리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


아이 손을 잡고 광장에 나가지 못한다
네가 죽어도 일을 해야 해서
누가 죽어도 나는 살아야 해서
기약 없는 먼 훗날을 끌어당겨서라도
지금 살아야 해서 촛불을 들 수 없는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


쪼들려서, 악착같이, 외로움에, 죄책감으로 찌든
수척한 감정들이 들러붙어 빠져나가지 못하는
나는 파란색일까 까만색일까 붉은색일까


내가 여자를 입었는지 여자가 나를 입고 있는지
나를 찾아 출구를 더듬거리며 오늘을 걷는다만
여자의 시간은 어디쯤에 머물러 있나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고 한다


p.12~13








죽어야 끝이 나는 발작 긴 세월 뼈에 새겨넣었을까 깊은 바닥 검은 기억들이 스멀스멀 기어올라 심장을 찌른다 폭발하는 내가 툭 튀어나와 익숙하게도 가장 약한 것을 물어뜯는다 시시때때로 폭주하는 나와 나와 나로 가득하다 도처에 사람이 위험하다 사람이 사람에게 위험하다


p.37









비릿하게 씹히는 두려움이 발길을 잡는다
네 손을 잡아도 불안하고 내 손을 잡지 않은
너도 불안하여
구덩이를 파서 둥그렇게 구부린 등으로
사람의 시간이 멈췄다


통증이 마비되어가는 사이 욕망은 견고해져서
지구 밖 별들을 호시탐탐 넘어다보며
생식기도 심장도 사라진 자본형 인간으로
진화 중


그리운 몸과 반항하던 추억과 애인 같은 언어를
두 손 모아 공손하게 바치고 나니
우아한 시대에 그림자가 되었다


p.48~49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망루에서
흔들리고 헝클어지며 질척거린다


날 선 날은 날을 세운 채 습관적으로 찔러대고
무딘 날은 날이 뭉툭해져 습관적으로 외면한다


밥과 자유는 닿을 듯 말 듯 닿지 않는
사람과 사람 사이


생존과 죽음의 경계는 고속도로에 서 있는
고라니의 이편과 저편


옳음과 그름이 한통속으로 놀아
정의는 정체성을 잃어버린 지 오래


서는 자리가 달라질 때마다 일그러지면서
가만히 웅크리고 있다 꿈틀거리는
통속적인 폭력의 얼굴


너덜해진 영혼을 끌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간다


p.52~53
반응형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