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기정 시집 / 고양이와 걷자

진유고 2024. 12. 7.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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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와 걷자
걷는사람 시인선 80번째 작품으로 하기정 시인의 『고양이와 걷자』가 출간되었다. 시인 하기정은 2010년 영남일보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해 시집 『밤의 귀 낮의 입술』을 냈으며, 제4회 5·18문학상, 작가의 눈 작품상과 불꽃문학상, 시인뉴스 포엠 시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18년 불꽃문학상을 받을 당시 “낯설고 위험하고 매력적인 질문으로 가득하”다는 평을 받았던 것처럼, 하기정은 이번 시집에서 마음과 마음이 만나 생기는 마찰과 겹쳐짐, 그리고 의식
저자
하기정
출판
걷는사람
출판일
2023.02.06
흰 무생채를 썰다 손가락에 빨간 피를 흘리는 곳
버무리면 스며들 것들의 목록을 재생해 보는 곳
뉘엿뉘엿 넘어가는 검은 소맷자락을


이제 그만, 놓아주는 곳


p.24









우리에게 같은 점이 있다면, 마주 본다는 것
점과 점을 이으면 그어지는 선처럼
당신이라는 얼굴의 반대쪽에
내가 서 있다


p.32







흰빛은 불안의 얼굴을 하고 있다


핏기 없는 얼굴로


순백의 아름다움이라고


규정짓는 사람들 때문에


결혼사진을 찍고 나면


드레스에 묻어 있는 먼지 때문에


거울을 깨트린다


누구라도 거기 앉으면 얼룩이 묻었다


낮에도 검은 물을 마시는 사람들 때문에


까마귀를 길조로 규정하는


새들의 무리 때문에


극지에서는 눈밭을 뒹구는 별들도 길을 잃었다


p.34~35








년 지난 연애의 피곤함과 지난 연애의 삼 년이
자정 지나 동시에 꺼지는 근린공원의 가로등
같았으면
그 밑에 손을 맞잡고 이별이 담보인 줄 모르고
지나가는
어린 연인 같았으면


짐승한테도 할 수 있는 말을 사람에게는 못한다
같은 침대에 있으면서 다른 꿈을 좇는 연인과
다른 침대에 있으면서 같은 꿈을 꾸는 연인들은
돛과 덫 사이에서 잠과 꿈 사이에서


발톱과 손톱 사이
잘라도 아프지 않은 몸이었으면
죽어서도 자라난다는 머리카락처럼
사후에는 모두
아름다웠으면 한다


p.48~49







결핍으로 가득 찬 이곳에 아무런 욕구가
없다는 거
분명 여긴 지옥일 거야
293호 열차 C칸에 앉아 네가 한 말이 생각나서
나는 밥숟가락을 들다 말았다


마음을 서글프게 하는 슬픈 시름과 세계와
아름답게 대결해 보겠다고
떠난 아침이었다


사월의 대왕참나무는 지난해 피웠던 잎들을
여전히 매달고 있던, 그런 저녁이었다


p.52








밤의 고양이처럼
지붕 위를 사뿐히 걸으며
한 발을 들면 다음 발을 내려놓을 것
고양이와 걷자

(...)

고양이와 걷자
느슨해진 밤의 건반을
딛자 딛자 딛자


p.7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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