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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자서전
된다. ‘삼차신경통’이라는, 뇌 신경계의 문제로 그녀는 매 순간 온몸이 전기에 감전되는 것 같은 고통 속에서 병원을 찾았으나, 메르스 사태로 병원을 옮겨 다니는 이중의 고통 속에 놓이게 된다. 세월호의 참상, 그리고 계속되는 사회적 죽음들 속에서, 그녀의 고통은 육체에서 벗어나, 어떤 시적인 상태로 급격하게 전이되면서, 말 그대로, 미친 듯이 49편의 죽음의 시들을 써내려갔다. 바로 그 결과물이 여기, 이 멀쩡한 문명 세상에 균열을 불러오며, 문학적으로는 고통
- 저자
- 김혜순
- 출판
- 문학실험실
- 출판일
- 2016.05.24
지하철 타고 가다가 너의 눈이 한 번
희번득하더니 그게 영원이다.
희번득의 영원한 확장.
네가 문밖으로 튕겨져 나왔나 보다.
네가 죽나 보다.
너는 죽으면서도 생각한다. 너는 죽으면서도
듣는다.
아이구 이 여자가 왜 이래? 지나간다. 사람들.
너는 쓰러진 쓰레기다. 쓰레기는 못 본 척하는 것.
지하철이 떠나자 늙은 남자가 다가온다.
남자가 너의 바지 속에 까만 손톱을 쓰윽
집어넣는다.
잠시 후 가방을 벗겨 간다.
중학생 둘이 다가온다. 주머니를 뒤진다.
발길질.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소년들의 휴대폰 안에 들어간 네 영정사진.
너는 죽은 사람들이 했던 것처럼 네 앞에
펼쳐지는 파노라마를 본다.
바깥으로 향하던 네 눈빛이 네 안의 광활을
향해 떠난다.
죽음은 바깥으로부터 안으로 쳐들어가는 것.
안의 우주가 더 넓다.
깊다. 잠시 후 너는 안에서 떠오른다.
그녀가 저기 누워 있다. 버려진 바지 같다.
네 왼발을 끼우면 네 오른발이 저 멀리 달아나는 바지, 재봉질도 없는 옷,
지퍼도 없는 옷이 뒹굴고 있다. 출근길 지하도
구석에.
(…)
저 여자는 죽었다. 저녁의 태양처럼 꺼졌다.
이제 저 여자의 숟가락을 버려도 된다.
이제 저 여자의 그림자를 접어도 된다.
이제 저 여자의 신발을 벗겨도 된다.
너는 너로부터 달아난다. 그림자와 멀어진
새처럼.
너는 이제 저 여자와 살아가는 불행을 견디지
않기로 한다.
p.9~11
한 인형이 다른 인형이 태워지는 것을 보는데
강 건너편에서 보다가 가까이 가서 보는데
먼저 머리 껍질이 타들어가는 것을 보는데
누가 한 사람을 데려가고
여기 장작더미 위에 그의 인형을 갖다 놓았을까
오늘만 좀 재워주세요 하더니 영원히 일어나지
않는 손님처럼
몸이 다 타도록 그 사람은 돌아오지 않네
p.114
너는 이제 얼굴을 다 벗었다
하얗고 둥근 달이 동쪽에서 뜬다
동서남북 천 개의 강물에 천 개의 가면이 뜬다
p.122
고통만큼 고독한 것이 있을까. 죽음만큼 고독한 것이 있을까. 저 나무는 나를 모른다. 저 돌은
나를 모른다. 저 사람은 나를 모른다. 너도 나를 모른다. 나도 나를 모른다. 나는 죽기 전에 죽고 싶었다.
잠이 들지 않아도 죽음의 세계를 떠도는 몸이
느껴졌다. 전철에서 어지러워하다가 승강장에서 쓰러진 적이 있었다.
저 여자가 누군가. 가련한 여자. 고독한 여자.
그 경험 다음에 흐느적흐느적 죽음 다음의
시간들을 적었다. 시간 속에 흐느끼는 리듬들을 옮겨 적었다.
죽음 다음의 시간엔 그 누구도 이름이 없었다.
p.126~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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