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후 시집 / 울려고 일어난 겁니다

진유고 2024. 12. 9. 05:49
반응형
SMALL



울려고 일어난 겁니다
서리 덮인 유리창에  오늘은 봄날 하고도 하루 더,라고 씁니다
저자
김경후
출판
문학과지성사
출판일
2021.07.05
씨앗을 심었지만
붉은 꽃잎 한 장 없이
죽었습니다


바람도 없는 거리
가로등 켰다 껐다 켰다 껐다


나는 방향 없이
달리는 속도를 높입니다


p.10









그래, 나 바닥이다, 울툭불툭, 넙치, 시장 바닥에 누워 있다, 뭘 보고 있나, 그것, 진창 바닥보다 넓적하게, 바닥의 바닥이 되면서, 대체 뭘 보고 있나, 가끔, 이게 아냐, 울컥, 찌끄레기를 게운다, 뒤척인다, 하지만 다시, 눌어붙어, 바닥이 되지, 바닥, 뭘 볼 수 있나, 게슴츠레, 흰 눈자위로, 울컥, 찢어진 노을, 키득대는 웃음, 흐르고, 슬리퍼 끄는 소리, 지날 때마다, 울컥, 소리친다, 그래, 나, 바닥이다, 그것, 더욱 맹렬히 바닥이 되기로 맹세한다, 끌로도 끝으로도 떼어낼 수 없는 바닥, 더 바닥, 더, 더, 바닥이 되기로, 울컥.


p.13








시간은 멈추고 세월은 흐른다
일어나자마다 운 게 아니에요
울려고 일어난 겁니다
사랑보다 빨리 쉬는 건 사람 그러나
난 쉬고 싶은 사람
울려면 일어나야 합니다

(...)

세월은 흐르고 시간은 멈췄다
그럼 자신을 어쩔 줄 몰라 하는 남자를
어쩔 줄 몰라 하는 여자는 어찌해야 할까
아무도 잘못하지 않았다는군
변한 건 없지
고양이를 감시하는 카메라를 감시하는 고양이가
저만치 나를 보고 있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지
시간은 멈추고 세월이 흐른다


p.14~15








검은 연기보다 검은 구석방
뚜껑 닫힌 피아노 소리가 들린다


아무도 오지 않던 외딴 집
불타던 소리가 들린다


그건 아주 오래전
이라고 말하는 건 언제나 지금


아무도 너랑 같이 치면 안 돼
아무도 나랑 같이 치지 않아


아니 검은 거 말고 흰 거 이젠 틀리지 마
검은 거 말고 더 검은 거 이젠 틀리지 않아


불딴 검은 뼈
밑으로 흔들리는 흰 발들


검은 기다림
밑으로 흔들리는 흰 목소리


이젠 한 음도 틀릴 수 없는 행진곡
아무도 너랑 같이 치지 않아


구석방
홀로 뚜껑 닫힌 피아노


p.22~23








그건 젖은 나무 문이 주저앉을 때
그건 가슴뼈를 움츠릴 때
그건 할 말이 없을 때
나는 소리

슬픔이 무릎을 건드릴 때
그래도 설 수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소리
마음의 고무줄 삭아 끊어질 때
나는 소리




밤의 송곳니가 부러지는 소리
그때 우리도 함께 부러지는 소리
말도 안 되는 소리
서로 돌아서는 소리

홀로가 아니라 스스로 내가 되는 소리



내가 나를 뚫어지게 보라고
진흙탕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
젖지 않은 나무 문은 내지 못할 소리


p.30~31
반응형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