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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유지되어야 한다
k-포엣 시리즈 32권으로 김사이 시인의 『가난은 유지되어야 한다』가 출간되었다. 『반성하다 그만둔 날』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고 한다』 이후 세 번째 시집이다. 앞선 시집들에서 노동 현장의 부조리함과 그 속에서 이중으로 고통받는 여성 노동자의 현실을 절실하게 그려낸 시인답게 이번 시집에서도 부조리한 삶과 사회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풍경은 개선되는 것 없이 교묘하게 더 나빠지고 있는 것만 같다. 시인은 그러한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이 세계의 아픔을 함께하며 그 자리에서 노래한다.
- 저자
- 김사이
- 출판
- 아시아
- 출판일
- 2023.06.30
병시중이 절실한 식구가 있는데
아이를 홀로 두고 일하러 갈 수가 없는데
어정쩡하게 가난해서
학자금 보조도 청년주택자금 지원도
자격이 안 되는
너라는 시간은
산소호흡기 낀 가난이라고 증명해야
다음 너를 대출받는
가난은 자본의 밑천
그러니까 가난은 유지되어야 한다
빚이 빛이 되는 양극화 속으로
다음 이력서를 쓰고 다음을 면접한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다음
오늘 양식은 어제로 소진되고
엄살도 사치여서 가릴 것이 없다
오래전 함께 나누었던 눈물조차 마른
나라는 시간은
굶지는 않아도
아직 굶어 죽지 않았으니
p.13~14
너와 나의 외로움이 달라서
가는 길이 갈라진다
외로워지지 않기 위해
너는 웃는 법을 나는 우는 법을
돈 주고 배운다
홀로 태어나도 축복으로 태어나도
사람으로 태어난 건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인데
그 단순한 길을
누구는 사람으로 누구는 짐승으로
무엇으로 누구 때문에 갈라지고 바뀌는지
사파리 안에서 밖에서
고독하게 홀로 살아가는
인간이란 동물은
그 외로움마저 돈으로 환산해서
사고판다
너의 외로움을 구매하고
나의 외로움을 팔고 있다
나는 외로움을 내 돈 주고 산다
p.40~41
소통이 막힌 관계가 얼었다
상처 아문 자리에 생살이 돋다가 굳었다
어쩌다 당겨쓴 내일이 그러다 바닥났다
일상이 낮은 데로 얼어붙었다
엊그제보다 덜 추워도 아프다
훗날 오래된 풍경처럼 아프다
속절없이 파랗다
p.44
복종을 믿음으로 씹으며
지독히 무지했던 날들
오랜 상처는 무늬를 그렸다
돌아서면 가시덤불에서 잠을 깨고
기억의 낱장들이 불쑥 찾아와
멀미처럼 울렁거리는
불에 덴 듯 깜짝 놀라 털고 털어내지만
찐득하게 붙어 있는 편두통 같은
감정의 얼룩들
p.53
무작정 걸었고, 제자리걸음. 문 앞에 섰다.
창호지를 바른 나무문.
어릴 때 살던 집의 창호문이다.
문밖의 상황을 살피기도 하면서, 어떤가를
기다리면서 뚫었던.
어떤 겨울에는 구멍 밖 세상을 꿈꾸었던.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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