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다연 시집 / 서로에게 기대서 끝까지

진유고 2024. 12. 21.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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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에게 기대서 끝까지
세상을 응시하는 예민한 감각과 탁월한 시적 감수성이 돋보이는 단정한 시 세계를 펼쳐온 정다연 시인의 『서로에게 기대서 끝까지』가 창비시선으로 출간되었다. 2015년 『현대문학』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한 후 처음으로 선보인 소시집 『내가 내 심장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니까』(현대문학 2019) 이후 2년 만에 펴낸 이 시집에서 시인은 “정돈된 아름다운 언어들”(조대한, 해설)로 세계에 만연한 폭력과 거기에 굴하지 않는 연대의 마음을 펼쳐낸다. 미래를
저자
정다연
출판
창비
출판일
2021.10.08
흐린 날씨다 철교를 따라 걸으며


나는 스스로에게 건강하게 살고 싶다고 말한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과 연이은 불행


찢기고 찢긴


(…)


나보다 앞서간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진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그가 계속해서 가고 있다는 믿음이 천천히 머리칼을 적신다 안개처럼


p.36~37








요즘 나는 바싹 마른 잎 같다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면 소리가 잘 들리지않는다


하루 세번 약을 먹고 개와 산책한다
혼자에 가까워지고, 주기적으로 볕을 쬐는 일은 나의 건강에 도움이 된다 그렇게 믿으며


공원에 도착한다


체조는 허파와 근육을 튼튼하게 만들어준다
믿는다 아무런 의심 없이


p.38








시가 안 써진다는 이유로 홍콩야자라 불리는


셰플레라 화분을 샀다


수건으로 잎을 닦아주면 윤기가 생겨


관상하기에 좋다고, 가게 아주머니가 말해준다


덧붙여서 물과 음지를 좋아한다는 것도


깨지지 않게 품에 안고 가세요


유리문이 닫히고


깨뜨릴까봐, 나는 품에 안고 조심조심 걸어간다


(…)


첫날에는 물만 흠뻑 주고 삼일은 지켜보기만
하세요


그 말을 몇번이고 곱씹는다


나의 너무 많은 최선이 식물을 괴롭히지 않도록


거리를 둔다


조명을 어둡게 한다


나는 그것이 잘 자랐으면 좋겠다


p.56~57









해변에 가자


혼자라면 발자국이 두개, 아롱이 밤이와 함께
걸으면 발자국이 열개


스무개, 서른개……


셀 수 없는 무늬로 모래사장을 물들이자 파도가 다가와서 열개의 다리를 적셔도 멈추지 말자
첨벙첨벙 발을 구르자 각자의 감촉으로 햇살 아래 몸을 말리자


개 반입 금지


현수막을 운동장에서, 거리에서,
해변에서 만나게 된다 해도 걷기를 포기하진 말자 코너의 벚나무까지 달리기, 창 너머 들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이기를 멈추지 말자


비에 젖은 흙냄새, 실밥이 뜯긴 야구공,
풀숲에 뛰어들기를 끝내지 말자


열개의 다리로, 수많은 풍경 속에 발 담그기를
계속하자


바람에 흩날리는 제각각인 우리의 빛깔을
그림자와 그림자로 이으며, 킁킁 가끔 뒤돌아
서로를 확인하면서


모르는 길 밖으로 나서기를 두려워하지 말자
가볍게 가볍게 땅에 그어진 선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으며


이 걷기를 계속하자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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