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달자 시집 / 전쟁과 평화가 있는 내 부엌

진유고 2024. 12. 2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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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가 있는 내 부엌
신달자 시인의 시집 『전쟁과 평화가 있는 내 부엌』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스물에 등단한 이후 쉼 없이 시를 써 온 시인 신달자가 팔순에 펴내는 시집이다. ‘손에 닿는 모든 것이 시가 된다’는 평을 받아 온 신달자는 『전쟁과 평화가 있는 내 부엌』에서 섬세하면서도 통렬한 어조로 나이 든 몸의 고통을 그려 낸다. 늙어 가는 몸에서 비롯되는 찌르는 통증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시인의 하루는 몸을 어르고 달래는 일로 채워진다. 얼음과 숯불 사이를 오가며
저자
신달자
출판
민음사
출판일
2023.04.07
냉동고에는 치미는 분노와 살인적 치욕이 멈춘
채 정지되고
세상에 새면 안 되는 일급비밀이 급냉동되어
무표정하게 굳어 있고
하나의 서랍엔 비상약이 수북하게 약 주인을
향해 위협적으로 수군거리고
한 주먹 털어 넣으면 영원한 안식으로 가는 약이 밤마다 눈인사를 하고


(…)


이런 게 삶?
전쟁 공부에서 많이 보았던 풍경?
박수근 화백의 엽서 속 소가 보는 앞에서 소고길 잘게잘게 다지는 도마 위
밥이 다 되면 전기솥에서 푸우욱 치솟는 연기가
극초음속 마하 10 탄도 미사일이라고 생각하는
이 전쟁의 핵심은 오늘도 먹는 일
먹을 걸 만드는 일
밤늦도록 평화로운 공포 속
어둠 내리면 붉은 태양 같은 따뜻한 불이 켜지는 내 부엌.


p.15~17








피딱지처럼 말라붙어 있는 것들이
오래 엉겨붙어 떨어지지 못한 격한 것들이
일제히 깃발을 들고 일어선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단풍 든 나무들이
각자 개인 사연들을 움켜쥐고 줄지어 섰다


p.30








허공 한 줌 주웠다가
후딱 손을터니 내 생이 훌렁 비워지는구나
비웠다고 생각하는 그 빈손에 찰거머리처럼 붙어 있는
아직은 살아 있는 생


작은 조각일지 몰라도
너무 할 말이 많고 너무 쓸 것이 많다는
그냥 손 털고 비 맞고 서 있는 오후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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