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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불이었고 한숨이었다
걷는사람 시인선 65번째 작품으로 신준영 시인의 『나는 불이었고 한숨이었다』가 출간되었다. 시인 신준영의 첫 시집으로, 4부로 나뉘어 총 57편이 담겨 있다. 시인은 2020년 《실천문학》 신인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등장했다. “결 고르게 뛰어난 감각과 예리한 사물 인식이 돋보였다. 무엇보다도 한 편의 시를 끝까지 완성시키려고 하는 감투(敢鬪) 정신이 느껴졌다.”는 평을 들은 바 있다. 이 시집은 제목에서도 볼 수 있듯이 “나는 불이었고 한숨이었다”는
- 저자
- 신준영
- 출판
- 걷는사람
- 출판일
- 2022.08.15
오해와 이해 사이에서 만들어낸 불편한 문장들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내가 나를 오해하며 살아내듯 당신도 당신을 오해하며 견디길 바랍니다.
2022년 여름. 신준영
나는 발명가이며 조련사다 오늘까지 일만육천삼백스물여섯 개의 감정을 발명했고 이것으로 매일 나를 길들여 왔다 어둠을 응시하는 백만 개의 눈동자였고 목에 걸린 방울이었으며 잠 속까지 좇아오는 그림자였다
나는 불이었고 연기였고 한숨이었는데 이것들을 소화하며 마침내 괴물에 이르렀다 이 흉측하고 아름다운 것을 내가 낳았구나
p.14
전생을 바람에 묶은 채
벼랑에 매달린 남자가 귀를 뜯고 있다
사람 몸에서 가장 나중까지 살아 있는 게 귀라는 거 알아?
귀를 죽여야 마음이 사는 건데
그래서 남자는 그 많은 귀들을 자르러 다니는지 모른다
p.54
가닥가닥 땋인 채 산길에 남겨진 각시풀처럼
누가 풀어 주기 전에는 풀리지 않는 마음이 있다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지는 사람은
완벽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어서
자다 깨어 혼잣말하는 사람 곁에
계단참에 문득 멈춰 서는 사람 곁에
점으로 총총하다
처음부터 낯설지 않은 별들이 있다
(…)
놓아주기 전에는 놓여나지 않는
손목 같은 것이 있어
어느 날 문득 사라지는 사람은
공공연한 음모로
별자리마다 비밀을 키운다
p.74~75
당신을 뽑아내려 애쓰는 손
당신이 뽑혀질까 겁먹는 손
무거워지지마
무거워지지마
심장의 붉은 가시가 자라나
두 눈을 찌르고
눈 속 장미에 놀란 당신은
그림자를 걷고
밤을 허물고
날아가네
가벼워지지 마
가벼워지지 마
눈을 찌르고 눈을 가리고
장미는 담장을 넘어가네
가시 화관을 쓰고 혼자 떨고 있는 나여
가시를 뽑아내려 애쓰는 손
내가 뽑혀질까 두려운 손
이것은 처음부터
허물기 위해 시작된 관계
부서져야 끝나는 노래
p.80~81
잠복한 짐승의 눈을 하고
그것은 웅크린 채로 있었다
비가 오면 어김없이 기어 나와
바닥을 휘젓고 가던 그것은
한 번도 속을 보여 준 적 없었으므로
깊이를 짐작하는 일 또한 어려웠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일보다
바닥의 물을 퍼내는 일로 하루를 시작하는 날이 잦아질 때
바닥에 쪼그려 앉았던 여자는 문득
들여다본 적 없는 그것의 속이 오래 앓아 왔음을 알았다
앓아내느라 기척 없던 함구의 날들을 떠올렸다
여자 혼자서 캄캄해질 무렵이었다
목구멍으로 되삼켜 버린 말들이 다다르는 몸속
깊은 곳이 있어
밤이면 탕탕 바닥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계 수위를 지나온 말들이
바닥을 버리고 돌아 나오던 밤
구멍이 게워낸 속을 맨손으로 퍼 담던 여자가
한 다발 각혈로 피어나 마당을 걸어 나갔다
빈 아궁이에 불을 넣던 손이 사라진 그곳
구멍은 여전히 살아남아 헐어 버린 목구멍으로
삼킨 말들을 뱉어내곤 한다
p.9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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