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율 시집 / 온다는 믿음

진유고 2024. 12. 14.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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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는 믿음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한국 문학 시리즈인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마흔다섯 번째 시집으로 정재율의 『온다는 믿음』을 출간한다. 2019년, “어긋남과 예기치 못”함, ‘서투름과 과감함 사이를 지나가는 감각’(신용목)으로 호평을 받으며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이다.  「은하철도 999」에서 영원한 삶을 꿈꾸었던 나무인간 모리키 씨(*TV판 「은하철도 999」 21화 참조)를 입체적으로 형상화해 애니메이션의 장면들을 환상동화
저자
정재율
출판
현대문학
출판일
2023.03.25
속도를 줄여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나와 더 멀어질 뿐인데


p.28








어떤 마음은 돌처럼 깊숙이 박혀서
빠져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그는 요새 죽는 꿈이 아니라
사라지는 꿈을 꾼다고 말했다


그건 조금 다르다고


죽는 건 아무 생각이 들지 않지만
사라지는 건 천천히 느려지는 것이라고 했다


그가 돌무덤을 다 쌓을 때까지


나는 가만히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자리로 돌아가 앉을 때까지
그의 영혼이 이곳을 떠날 때까지


어디선가 마음 하나가 굴러 들어왔다


p.30~31











계속해서 같은 풍경이 반복되었다
덜컹거릴수록 멀미가 심해져갔다


열차의 안과 밖을 잘 구분하기 위해서
어두운 창을 뚫어져라 쳐다봐야만 했다


컴컴한 것과 캄캄한 것
깜깜한 것과 껌껌한 것


어둠에도 여러 종류가 있었고


어두컴컴한 것을
뚫어지게 쳐다봐도


죽은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생각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승객들은 서로의 등을 두들겨주었다


누군가는 화장실로 달려나갔고
누군가는 그 자리에서 헛구역질만 해댔다


인간의 몸에선 무엇 하나 쉽게 나오는 게 없었다
밖에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닌 것처럼
무엇 하나 쉽게 얻는 게 없었다
영혼 또한


p.38~39










지긋지긋해
옆에 앉은 승객이 말한다


열차는
움직이고 멈추고를 반복하면서


앞으로 갔다가 다시 되돌아오는



p.42










이렇게 계속 평화롭게 앉아 있어도 되는 걸까


작은 벌레들이 주위를 빙빙 도는 것처럼
회전 교차로엔 차들이 많다


그중 한 차량은 언제든 길을 빠져나와 우리를
덮칠 수 있다는 생각이


사고는 순식간에 일어나고
공원 한쪽에서는 깨진 거울을 주워 담는다


그새 풀들이 길게 자라 있다


p.7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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