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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없는 그림책
한 권의 동화책을 읽는 평온함과 첫 걸음마를 떼는 불안함
그 모든 순간을 보살피는 돌봄의 손길
동시대 시를 읽는 즐거움을 선사하며 한국시의 목록을 새로이 쌓아가고 있는 문학동네시인선이 올해를 여는 첫 시집으로 남지은 시인의 『그림 없는 그림책』을 선보인다. 2012년 문학동네신인상을 통해 “격렬함을 고요하게 표현할 줄 아는 재능”(문학평론가 신형철)이 있으며 “언어를 절제한 만큼 의미-이야기가 증폭된다는 시의 ‘황금률’이 모범적으로 적용된 시”(시인 이문재)를 쓰고 있다는 찬사와 함께 작품활동을 시작한 후 12년 만에 펴내는 첫 시집이다. 긴 시간 섬세하게 퇴고를 거듭한 끝에 50편을 추린 이번 시집에는 한 권의 그림책을 읽듯 따뜻하고 평온한 시들과 첫 걸음마를 뗄 때의 위태로움을 담은 시가 함께 담겨 있다. 간결하고 단단한 문장으로 세계의 면면을 포착해냄으로써 눈에 띄지 않는 존재에게까지 손을 내미는 남지은 시의 처음을 기쁜 마음으로 소개한다.
- 저자
- 남지은
- 출판
- 문학동네
- 출판일
- 2024.03.25
밤을 새운 적이 있다
큰 토끼가 명령했기 때문에
작은 토끼는 종종 그런 적이 있다
깜깜하고 차가운 하늘에
조각달이 비뚜름하게 걸려 있다
작은 토끼의 눈에
큰 토끼는 깨진 왕관을 쓴 왕처럼 보였다
활활 타오르는 집을
깊은 눈동자에 밤새도록 담으면서
작은 토끼는 조금씩밖에 자랄 수 없었다
p.12
뽀족한 악몽을 밀어내고
담장에 오르는 새벽
나는 내가 비좁다
창을 열면
내 안으로 눈이 내리고
붉은 새가 걷는다 붉은 새가
떼로 날아오르면
검게 찢어지는 하늘이
칼들이 쏟아져내리고
아버지가 보인다
취한 손으로 가족들 발톱을
뽑아내는
모두가 찌르고 모두가 찔리고
모두가 떠나지 않고 이곳에 서 있다
내 안으로만 쌓이는 눈
창이 열리면
나는 나를 뚫는다
새는 새를 뚫는다
p.38~39
흐려진 날씨에 대해
흐트러진 그림자에 대해
말할수록
기도할수록
입안은 캄캄하다
그치지 않는 비만큼
그칠 줄 모르는 겁먹음
바늘귀만한 입술 틈으로
깊고 날카로운
빗줄기가 들이닥치던 순간부터
잠겨들어
손닿지 않는 구석이 상해가던 날까지
p.47
이사를 했다
주전자엔 새 물이 끓고 있다
익숙한 데서 옮겨와
유리잔 몇 개는 꽃병이 됐다
문득 궁금했고 자주 궁금했던 친구들과 앉을
식탁엔 꽃병을 두었다 꽃도 말도 정성으로
고르고 묶으면 화사한 자리가 되어서
곁이란 말이 볕이란 말처럼 따뜻한 데라서
홀로는 희미한 것들도 함께이면 선명했다
모두들 어디로 간 걸까 왜 나만 남았을까
그런 심정은 적게 말하고 작게 접어서
비우고 나면 친구들이 와
새롭게 채워지는 것들이 있다 식탁엔
커피잔을 들면 남는 동그란 자국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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