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조용미 시집 / 초록의 어두운 부분
진유고
2024. 11. 15.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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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의 어두운 부분
나를 열어 당신을 맞이하는 포즈
높고 낮고 넓고 깊은 색의 끝에 다다른 하나의 색
어둠 속에서 더 선명해지는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인 조용미의 여덟번째 시집 『초록의 어두운 부분』이 문학과지성 시인선 602번으로 출간되었다. 고통 속에서 길어낸 상처의 미학을 선보인 『당신의 아름다움』(문학과지성사, 2020) 이후 4년 만의 신작이다. 1990년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 30여 년의 세월 동안 부지런히 쓰고 발표해온 그의 초록빛 언어는 여전히 싱그러우며 그 시간만큼 웅숭깊다. 이번 시집에서 조용미는 지극한 눈길로 무언가를 오래 바라본 자만이 그려낼 법한 생의 정취를 빚어낸다. “불을 끄고 누”워 “낮에 본 작고 반짝이는 것들”(「산책자의 밤」)을 생각하고 “꽃 진 살구나무 대신/살구나무 그림자를 유심히 본다”(「봄의 정신」). 그리하여 “사과나무의 어두운 푸른색에 깃든 신비함을 볼 수 있다면 더 깊은 어둠을 통과할 수 있다”(「물야저수지」)는 성찰에 도달한다. 그곳에는 이윽고 스러지는 존재의 나약함 대신, “그러니/조금만 더 존재하자”(「관해」)고 다짐하는 삶의 의지가 있다.
짧고 무의미하지만 두고두고 환기되는 어떤 미적 체험의 순간이 있다. 그래서 그 무의미함이 무의미를 뛰어넘는 심미적 경험이 되는 신비한 일이 드물게 일어난다. 빈 가지 위에 앉아 있는 까마귀들, 누군가와 함께 보았던 어둠 속 폐사지의 삼층석탑, 차창으로 지나치며 얼핏 바라본 과수원의 과일을 감싸고 있던 누런 종이들이 내뿜는 기운, 그런 것들에 나는 잔혹한 아름다움을 느끼며 몸서리치곤 했다. _‘뒤표지 글’ 부분
- 저자
- 조용미
- 출판
- 문학과지성사
- 출판일
- 2024.05.08
검은 초록과 연두가 섞여 있는 숲의 감정은 우레와 폭우에 숲의 나무들이 한 덩어리로 보이는 것처럼 흐릿하고 모호하다
p.11
몰라보게 수척해졌다
여러 해 먼 길 찾아와 그 아래 서 있다 돌아오곤 했던
한 그루 매화나무
멀리서 보기에도 야위었다
한 해 거른 사이 가지가 잘려 나가고
듬성듬성 빈 곳이 많아지다니,
허연 버짐이 멍처럼 덮였다
근처 어린 매화는 많이도 꽃을 피웠는데
내 아는 오래된 나무는
대낮에도 어둑한 그늘에 든 것처럼
환한 기운이 사라졌다
꽃잎이 희끗희끗 겨우 돋아나 있다
내후년쯤 다시 오면 나를
알아볼 수 있을까
안아볼 수 있을까
나무가 나의 병을 근심한 걸까
내 얼굴 어두워
어떤 마음의 작용으로
나무와 나는
같은 기와 색을 가지게 된 걸까
매화와 나는 밝은 그늘이 필요하다
천천히 바라볼 운명이
필요하다
p.30~31
저수지는 검은색의 감정을 빌려 우울을 감추었기에 가늠할 수 없는 깊이가 되고 말았다
p.41
보고 있는 것을 생각으로 옮기지 않을 수 있을 때
강력한 내면을 가지게 되는 걸까
겨울은 기억의 잔상으로 채워지는
침묵을 통과하고 있다
비유가 가장 긴 봄을 감당하길 바라는 것,
봄 뒤에 겨울이 다시 오는 것을
견디는 것,
말한 것을 생각으로 옮기지 않을 수 있을 때
유연한 내면을 가지게 된다
p.71
기이하다 오래전에 나는 당신과 함께 모든 걸
나누었던 것 같다 같은 공간과 시간에서 서로에게 마음을 다했던 것 같다
왜 지금은 이토록 남인가 다른 생을 받으면
이렇게 다시 시작되는가
이전의 모든 생은 분명하고 또 어렴풋하다 모든 생에서 나는 나의 기억과 함께였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그런 걸 알 수 가 있을까 당신은 지독한
타인이고 다음 생까지는 너무 멀다
언제나 다음 생을 믿을 만큼 나는 어리석었다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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