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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화 시집 / 알바니아 의자
진유고
2024. 11. 13.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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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니아 의자
걷는사람 시인선 69번째 작품으로 정정화 시인의 『알바니아 의자』가 출간되었다. 《시와반시》 1회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한 시인은 화가로서도 활약하고 있다. 〈그 길은 네 뒤에 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같은 제목으로 일곱 차례의 개인전을 열었다. 이러한 시인의 글은 뚜렷하고도 돋보이는 색채감으로 독자들을 먼 곳으로 안내한다.
시집 『알바니아 의자』에는 사물화된 시선으로 보는 세계가 자주 등장한다. 표제작 「알바니아 의자」에서 “배고픈 도마뱀은 주파수가 잡히지 않는 라디오 위에 올라가 긴 안테나를 올리고 있습니다/(…)/베개 커버를 뜯어내어 몰려오는 밤안개를 덮고도 우리 심장은 따뜻합니다”와 같이 생명력을 불어넣은 문장들이 시선을 끈다. “지붕이 없으니까 장미가 없으니까/가시는 두 귀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고양이였다고 할 수는 없다/말을 하고 말았으니/고양이였다고 할 수는 없다”(「고양이였다고 할 수는 없다」)라는 표현에서처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면 주변 어딘가에 숨은 ‘비밀의 문’이 열리고, 그로 인하여 독자는 시를 읽는 기쁨을 오롯이 느낀다. 무심코 지나치던 일상적인 풍경에서도 이질적이고 신비한 느낌을 받게 만드는 힘이 정정화의 시에 깃들어 있다.
정정화 시인이 가진 팔레트는 무성하다. “내 몸은 헝겊처럼 해져 색칠을 해야 합니다 두 무릎을 동그랗게 오므리면/검고 두꺼운 점이 왼쪽 무릎에 출렁입니다”(「콜링 유」)라고 노래하거나, “저녁은 점점 아랫배가 아픈 사람처럼 붉어져 오고/(…)/난 민트 빛 손톱을 지우지 못하고 자꾸 햇빛인 듯 덧칠을 합니다”(「민트 빛 손톱」) 같은 문장들은 시를 읽는 우리가 곧 그 몸이 된 것처럼, 아픔 속에서 꿈꾸는 환상의 세계를 감각하게 한다. “팔레트는 초록색이 점점 닳아져 갑니다 붉어지려면 지금이어야 할 듯합니다” (「아침의 피아노」) 같은 문장, “손바닥은 매일 다른 색이 입혀져 있었으니까/염색공이라고 불러요/(…)//바다 건너 이 작은 냄비에 끓여지기까지/문장들은 얼마나 아름다운 시가 될 수 있을까요”(「염색공」)에서 볼 수 있듯 정정화는 의지와 위로의 말들을 모두 색으로 표현해낸다. 그가 그려낸 색채들은 ‘늪’ 같은 시간들을 환기換氣시키고, 있는 듯 없는 듯 희미하던 희망을 우리 눈앞에 가져다 놓는다.
시인은 강인한 사람이다. 불가능한 회복이 있음을 받아들이면서도 “오늘 밤 난 음악회에 갑니다/아주 먼 곳이 되어 돌아올 생각입니다”(「통영」)라고 다짐하듯 다른 미래를 예지하기도 한다. 그런데 시인이 바라는 미래는 마냥 기쁨과 환희에 찬 시간이 아니다. 오히려 고통에 더 귀 기울이고, 존재들의 울음소리에 더 예민해지기 위한 성장과 탐색을 의미한다.
해설을 쓴 김안 시인에 의하면 정정화는 어떤 존재의 “울음소리를 시인 스스로 벽이 되어 반향시켜 자신의 귀 속에 넣어 두고 싶다는 의지”를 놓지 않는다. “마른 울음 한번 터트리지 못한 첫아이는/물컹 내속을 빠져나갔다//매일매일 울음은 저녁 무렵을 통과했다”고 「벽」이라는 시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시인에게는 “통증과 고통의 반복을 기록하는 일”이 곧 시다.
추천사를 쓴 문정희 시인은 말한다. “안이한 정서나 지적 포즈에 길들지 않은 염색공이 붓과 펜을 번갈아 집어 들고 간절한 호흡으로 은종을 울리고 있다.”고. 정정화의 몸속에는 화가와 시인이 함께 살고 있다. 이 시집은 “제 몸속의 화가가 제 몸속의 시인을 만나 눈물을 흘리며 내지르는 심미적 탄성”(추천사)이다.
- 저자
- 정정화
- 출판
- 걷는사람
- 출판일
- 2022.09.25
아직 뚜껑조차 열지 못한 물감들이 많다.
이 색이 어울릴지 조금 확인만 하고
닫아 놓은 것들도 있다.
너무 오래되어 굳어 버린 것들도 여러 개나
된다.
온 힘을 다해 열어도 열리지 않는 물감들,
그러나 가만히 문을 두드리듯 똑똑 두드리면
기다렸다는 듯 쉽게 열리기도 한다.
그 시간이 시가 되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2022년 9월. 정정화
이 집에 이사 오면서 몸이 아프기 시작했지만
타일을 한 장 한 장 붙일 때마다
들리지 않는 다정한 꽃들을
화병에 모으기 시작했지
(...)
짝을 맞춰 유리잔을 사는 당신은
틈새를 잘라 깨진 타일 한 조각 맞추며 여름
저녁과 섞이고
모양은 달랐지만 향긋한 냄새가 나지 않는 건
없었지
발코니를 사랑했으니까 바닥은 포기할 수가
없었어
p.52
내가 태어난 이후로 가장 긴 장마를 보았습니다
아무리 제습기를 틀어도 얼룩들은 자꾸 부풀어
오르고
작은 화분은 이미 물속에서 잎을 띄우고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아픈 일들은 장마보다 더 길게
지나갔고
당분간 엉킨 마음들은 더 단단해기 전에는
햇빛에 바짝 말리지 못할 겁니다
물렁한 것일수록 그늘에 말려야 둥글고
갈라지지 않습니다
이름을 무엇으로 할까 고민했지만
이제 팻말은 더 이상 만들지 않기로 합니다
알 수 없어도 알아지는 일이 생겨나듯
담쟁이는 포스터를 슬쩍 덮을 만큼 자라나고
사람들은 다락으로 천천히 올라갑니다
p.83
낯선 동네에 있을 때 불안하지
아무도 없을 때 통증이 찾아왔으면
통증이란 빛바랜 낡은 가방 속 흰 알약들이
우르르 쏟아질 때처럼
순간과 영원의 반복이었으니까
(...)
다음 생애도 난 자몽 색 고양이 눈빛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기를
오래된 베개 속에 말린 팬지꽃을 넣어 두었지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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